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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방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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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5-01 19:12 조회6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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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방씨(溫陽方氏) 역사】

ㆍ비조(鼻祖:신농씨) → 원조(遠祖:方雷) → 동래시조(東來始祖:方智)

  → 시조(始祖) 또는 기세조(起世祖:方雲) → 파조(派祖)





※ 시조님의 호는 月峯임(갑자보 이래)

【시조 한림학사 월봉선생(始祖 翰林學士 月峯先生)】

시조의 이름은 지(智)이고 자는 천경(千慶)이며 호는 월봉(月峯)이시다. 서기650년경(당:唐 고종2년)에 한림학사로 계시다가 황제의 명령을 받고 동방의 신라에 오셨다. 당시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던 때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친당(親唐)정책을 택하였던 시절이었다. 선진국인 당나라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의 힘을 기르고자 노력하던 신라는 당나라의 학자를 초빙하였는데, 서기669년(문무왕9)에 바다를 건너오신 분이 월봉 시조님이시다. 마침 고구려와의 전쟁이 심하여 일시적으로 상주(尙州)에 머물러 계시다가 신라 조정에서는 이듬해 상대등 부한(夫邯)의 건의로 상원정사에 빈객부를 설치하여 선생을 맞이해서 국시문정(國是文正)이라는 강의를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라에 중국문장(中國文章)에 대해 밝게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서, 오직 설총(薛聰)만이 약통(略通)하므로 그를 헌병구임(헌병구임)에 두고 가르침을 베풀었다. 문법(文法) · 문예(文藝) · 문정(文正) · 예속(禮俗) 등의 의역(意譯)과 선전(宣傳)의 행사를 자세히 하여 육례회통(六禮會通)과 구경대지(九經大旨)를 밝혀서 유학(儒學)과 예교(禮敎)를 진흥시키고 민속의 융화(순화?)를 위해 지방을 순회하시었다.

처음에 동쪽으로 오실 때에는 신라에서 문화전달의 임무를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가 그 성과를 황제에게 보고하고 고향인 하남(河南) 땅에서 조용히 지내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관계가 점점 험악해져 전쟁이 계속되므로 문화사업 또한 지지부진하였을 뿐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본국인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 정벌에 내응하기 위해 신라에 여러 해를 계속 머물다가, 신라 사람의 권유로 부인을 맞이하니 그 배위(配位)가 장씨(張氏)이다. 676년(문무왕16)에 선생의 아드님이신 헌주(軒柱)가 가유현 현주(縣主)에 임명되고 후손이 이어지면서 답달비군(荅達匕郡), 곧 상주(尙州)에서 대(代)를 이어 살게 되었다. 





【고려 상서 좌복야 온수군 운(高麗尙書左僕射 溫水君 雲)】

서기 889년(신라 진성왕3)에 멸망한 옛 백제의 유민(遺民)인 견훤(甄萱)이 스스로 후백제를 세우고, 926년(경애왕3)에 신라를 습격하여 서라벌을 함락하면서 왕과 귀족들을 살해하였다. 이때 방씨 문중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임을 당했는데 하늘이 굽어 살피셨는지 오직 온수군 운(雲)만이 목숨을 건져 겨우 10세의 나이에 다행히 탈출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유랑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공께서는 천재를 발휘하여 재덕(才德)을 갖춘 문무쌍전(文武雙全)의 대장부로 성장하였으며 왕건의 후백제 정벌에 참여해서 크게 전공(戰功)을 올렸다. 또한 고려 초기에 요(遼)나라가 침공했을 때 결정적인 군공(軍功)을 세워 963년(광종14)에 상서 좌복야의 고위관직에 올랐고, 994년(성종13)에 온수군(溫水君)의 봉작을 받았으며 온양군 동쪽 8리 쯤에 위치한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과안산 아래에 자리 잡고 그 산을 배방산(拜方山)이라 이름하였다. 곧 「방씨(方氏)에게 절하는 산」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 자손이 온양(溫陽)에 세세손손 오래 살았으므로 온양은 방씨의 관향(貫鄕)을 상징하는 종읍(宗邑)이 되었다. 이와같이 온수군 이래 방씨는 고려의 세록지신(世祿之臣)이 되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다가 온수군의 14세손인 온천부원군(溫泉府院君) 언휘(彦暉)가 충목왕의 국구(國舅:왕의 장인)가 되었다. 이에 공민왕 때에 선대 왕의 증영미수(曾榮未遂)를 계승하고자 배방산의 제택(第宅)을 보호하기 위해 성첩(城堞)을 쌓고 그 안에 온수군의 묘원(墓園)을 옮겼던 소중한 터였다. 그러나 고려 말엽에 이르러 온수군의 16세손인 태부경(太府卿) 유정(有程)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름에 당당히 불응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자 모든 관직을 강등시키고 사패지를 몰수하였다. 아! 온수군 이하 모든 유택(幽宅)은 파괴되고 묘비를 비롯한 많은 석물들이 철폐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배방산(拜方山)은 고려 왕조가 방씨의 고유한 특권을 인정하여 ‘방씨에게 절하는 산’이라는 뜻으로 이름하였는데, 배(拜)를 배(排)자로 바꿔 배방산(排方山)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훗날 1714년(숙종40)에 온수군의 26세손 참의공 최일(最一)이 소계거정(訴啓擧旌)하였으나 비답(批答:임금의 답변)은 ‘선대 왕이 정한 사유를 뒤집을 수 없다’며 다만 ‘방(方)을 방(芳)자로 고치라’ 하여 그때부터 배방산(排芳山)이라고 불러 면(面)의 명칭도 따라서 배방면(排芳面)이 되고 말았다.
오호라!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고(桑田碧海) 해와 달도 뜨고 지는데(日月盈昃)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와 같이 억울한 경우를 당하고 기나긴 세월이 지났건만 우리 후손들은 통한(痛恨)을 씻어내지 못한 채 기형적(畸形的) 상태를 보면서 수백 년을 보내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 씨족이 분발하여 서로 호응하고 의견을 모아 배방산 옛터에 단(壇)을 쌓고 묘(墓)를 옮기는 정민지역(貞珉之役)을 하고자 분주하니 우리 방씨 문중에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 위 두 문장은 대동보 총록편에 있는 내용을 풀어 재구성한 것임.(완성도 80%)




【방씨 득성 소원록(方氏得姓遡源錄)】

1803년(순조(純祖)3·癸亥)에 병조참판이던 우정공(禹鼎公:31世)께서 청(淸)나라에 사절(使節)로 가셨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인 방진(方振)선생을 만나 방씨(方氏)의 상계(上系)를 물으니 방학사(方學士)께서 중국의 방씨 대동보(方氏大同譜)를 베껴 보내주셨다.
방씨의 비조(鼻祖)인 방뢰(方雷)께서는 신농씨(神農氏)의 11세손으로 유망(楡罔)황제의 맏아들로 태어나 하남성(河南省) 방산(方山) 땅을 봉토(封土)로 받으며 방(方)이란 성(姓)을 하사받았다.
1. 유망황제는 바로 염제(炎帝) 신농씨의 10세손이 되는 후예이다. 염제의 호(號)는 열산씨(烈山氏) 또는 연산씨(連山氏)라고도 하며, 황제의 재위기간이 140년이었다. 염제 신농황제의 성은 강(姜)이고, 황태후(皇太后:황제의 어머니)는 교씨(喬氏)로 이름은 안등(安登) 또는 사임(巳任)이라고 불렀는데 천지신명(天地神明)이 감동을 하여 신농씨를 낳으셨다. 또한 황후(皇后)의 이름은 분수씨(奔水氏)의 딸인 청발(聽詙)이다.
2. 염제 신농씨의 아드님 임괴황제(臨魁皇帝)는 임금 자리에 18년을 누리셨으며
3. 임괴의 아드님 승(承)황제는 재위가 6년이었고
4. 승의 아드님 명(明)황제께서는 49년을,
5. 명의 아드님 의(宜) 혹은 선(宣)황제께서는 45년을,
6. 선의 아드님 래(來)황제께서는 48년을,
7. 래의 아드님 리(裏) 혹은 양(襄)황제께서는 43년을,
8. 양의 아드님 절경(節莖)이며
9. 절경의 아드님은 극(克)이고
10. 극의 아드님이 유망(楡罔)인데 재위 50년을 누렸다.
득성(得姓) 비조(鼻祖) 뢰(雷)로부터 동방(東方)의 시조(始祖)이신 지(智)에 이르는 세계(世系)는 다음과 같다.

1세 뢰(雷) 2세 명(明) 3세 기(璣) 4세 창(倉) 5세 창(昌)
6세 범(範) 7세 신(神) 8세 복(福) 9세 선(善) 10세 각(覺)
11세 숭(嵩) 12세 변(辨) 13세 장(張) 14세 고(高) 15세 천(蒨)
16세 신(信) 17세 잠(潛) 18세 희(禧) 19세 효(曉) 20세 묘(昴)
21세 섭(燮) 22세 경(慶) 23세 예(禮) 24세 환(歡) 25세 도(道)
26세 현(懸) 27세 간(幹) 28세 천기(天期) 29세 서(緖) 30세 원(圓)
31세 상(象) 32세 숭(嵩) 33세 교(喬) 34세 악(岳) 35세 암(巖)
36세 우(禺) 37세 고각(高角)38세 황(皇) 39세 도(陶) 40세 환(煥)
41세 려(黎) 42세 상(霜) 43세 홍(鴻) 44세 준(俊) 45세 회(回)
46세 현(顯) 47세 천기(千期)48세 상(相) 49세 월(越) 50세 단(丹)
51세 사(砂) 52세 근(瑾) 53세 우(宇) 54세 홰(翽) 55세 진운(津雲)
56세 랑(郞) 57세 숭(崇) 58세 강(康) 59세 술(術) 60세 담(曇)
61세 작(灼) 62세 찰(察) 63세 개(豈)기(起)64세 라(羅) 65세 조(調)
66세 운(運) 67세 완(玩) 68세 결(結) 69세 원(遠) 70세 상(尙)
71세 리(履) 72세 유(劉) 73세 의(毅) 74세 위(威) 75세 통(統)
76세 혼(渾) 77세 장(璋) 78세 예(叡) 79세 예(譽) 80세 범(梵)
81세 륜(倫) 82세 침(琛) 83세 론(論)유(諭)84세 경양(景暘)85세 일(溢)
86세 가(假·叚) 87세 예(禮) 88세 등(謄·騰) 89세 좌(佐) 90세 숙(叔)
91세 금(擒) 92세 저(褚) 93세 고(固) 94세 원(元) 95세 걸(傑)
96세 고(翶) 97세 표(豹) 98세 료(遼) 99세 요(瑤) 100세 운(韻)
101세 감(埳) 102세 쇄(鎖) 103세 박(朴) 104세 경(瓊) 105세 약(約)
106세 령(靈) 107세 격(格) 108세 흔(忻) 109세 위(偉) 110세 망(望)
111세 굉(紘) 112세 웅(雄) 113세 저(儲) 114세 홍(洪) 115세 문량(文亮)
116세 륜(倫) 117세 조(祚) 118세 수(隨) 119세 신(伸) 120세 부(孚)
121세 초(初) 122세 봉(逢) 123세 호(皓) 124세 묘(苗) 125세 저(褚)
126세 달(達) 127세 인문(引文) 128세 도속(道屬) 129세 총(聰) 130세 분흥(分興)
131세 세웅(世雄) 132세 도명(道明) 133세 군강(君講) 134세 찬(讚)·지(智) 통일신라 입적 



한림학사(翰林學士) 방진선생(方振先生)
대 우정공(對禹鼎公) 송별시운(送別詩韻)

- 이 시는 방학사가 조선으로 돌아가는 우정공에게 지어준 것임

三千七百里 머나먼 삼천 칠백리 길에
阻隔路扁長 오래오래 소식 막혔더니
雲暎晨曦出 날 밝은 이른 아침에
天連海氣揚 바닷물 수평선에 넘실거리며
淵源遙可遡 먼 선조의 근원 아득하지만
款曲更何妨 정답게 소급해 찾으니 잘도 맞도다
祗此暫相過 이같이 잠간 만났다가 헤어지니
歸輅自遠鄕 수레타고 먼 고향 길 편히 돌아가소서


성자음의(姓字音義)
方字는

1. 시야(始也)라 처음이다.
2. 정야(正也)라 바르다.
3. 사야(事也)라 일 또는 섬긴다
4. 향야(嚮也)라 방위다.
5. 금야(今也)라 이제부터다.
6. 상야(常也)라 떳떳하다.
7. 모야(母也)라 어미다.
8. 비야(比也)라 견준다.
9. 단야(旦也)라 바야흐로
10. 술야(術也)라 방법이다.
11, 성야(姓也)라 성이다. 

 
중국 발음(華音)은 ‘빵’ 한국 발음(東音)은 ‘방’
 




【성관(姓貫)의 개칭(改稱)→ 관향(貫鄕)의 변천】

우리나라에 처음에는 방(方)이라는 성씨가 없었는데, 당(唐)나라에서 한림학사 월봉(月峯) 방지(方智)선생이 신라에 건너와서 방씨(方氏)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오늘날의 경상북도 상주에 정착하신 연유로 「상주(尙州)」가 처음으로 관향(貫鄕)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 초에 방운(方雲) 선조께서 나라에 공을 세워 온수군(溫水君)의 봉작을 받으면서 온수현(溫水縣)에 정착하여 대대로 후손들이 살았기에, 이로 인해 「온양(溫陽)」이 방씨의 관향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방씨로서 군호(君號)의 봉작을 받은 사람이 여섯 분인데, 모두가 온양과 관련된 명칭이었다. 온수군(溫水君) · 온양군(溫陽君) · 온창군(溫昌君) · 온천군(溫泉君) · 온성군(溫城君) · 온안군(溫安君) 등이다. 방씨의 관향이 여러 가지인데 모두가 온수군 운(雲) 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단일 혈통이다.



상주(尙州)의 연혁

상주는 방씨(方氏)의 옛 관향(貫鄕)인데 신라시대부터 지역 이름이 불려지기 시작했다. 상주의 다른 이름으로는 삼국시대에 답달비현(荅達匕縣) · 통일신라시대에 화령현(化寧縣)·가유현(嘉猷縣) · 고려시대에 화령현·중모현(中牟縣)·산양현(山陽縣) · 조선시대에 상주군(尙州郡)으로 지명(地名)이 변천되었다. 그 외에 평양(平陽) · 평산(平山) · 해상이(海上伊) 등 별명(別名)이 있기도 하다. 시조로터 중시조(雲) 이전까지는 상주에 세거(世居)한 것으로 보인다.



온양(溫陽)의 연혁

1. 백제 때 아술현(牙述縣) 또는 굴직현(屈直縣)으로 부르다가 탕정군(湯井郡)으로 바뀌었다.
2. 통일신라 때에 음봉현(陰峰縣) 또는 기량현(祈梁縣)으로 부르다가 탕정군으로 바뀌었다.
3. 고려 때에 아주현(牙州縣) 또는 신창현(新昌縣)으로 부르다가 온수군(溫水郡)으로 바뀌었다.
4. 조선 때에 온수군 또는 온양군으로 불리었다.
5.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에서는 아산군(牙山郡)에 편입되었다.


* 구(舊) 기해보(己亥譜)의 설명에 다르면 다음과 같다.
1. 온양은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으며 신라 문무왕 때 주(州)로 승격되었다가 고려 초에 온수군(溫水郡)으로 바뀌었다.
2. 1018년(고려현종9)에 천안부(天安府)에 예속되었다.
3. 1172년(고려명종2)에 감무처(監務處)를 설치했다.
4. 1414년(조선태종14)에 신창군(新昌郡)과 합쳐서 온창군(溫昌郡)으로 바뀌었다가 2년 후, 다시 신창과 나뉘어서 온수현을 두었으며 1442년(세종24)에 왕이 온천에 행행(行幸)하고 올 때 지금의 온양으로 바뀌었다.
5. 온양(溫陽)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정(鄭) · 이(李) · 방(方) · 강(康) · 윤(尹) 등이 있다.



* 배방산(拜方山)과 산성(山城)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금곡리
배방산은 현재 아산시 온양읍(온양온천)에 편입되어 있는 구(舊) 온양읍에서 약3㎞ 동남방에 있는 산인데 봉우리가 서쪽으로 연달아 가다 마지막 네 번째 봉우리이다.
옛날에는 과안봉(過雁峰)이라 일컬었으며 판서공(判書公)의 맏아들로 14세(世)인 온천부원군(溫泉府院君) 언휘(彦暉)께서 성(城)을 쌓고 성내에는 중시조 온수군(溫水君)의 유택(幽宅)을 모셨으며, 고려 공민왕이 배방산성(拜方山城)이라고 명칭을 내린 명승지였다. 장항선 모산역에서 기차나 버스로 약 2㎞ 정도 남쪽에 성이 둘린 산이 바로 배방산성이다.




【시조 한림학사 월봉선생 (始祖 翰林學士 月峯先生)】

시조의 이름은 지(智)이고 자는 천경(千慶)이며 호는 월봉(月峯)이시다. 서기 669년(당·唐고종2년)에 한림학사로 계시다가 황제의 명령을 받고 동방의 신라에 오셨다. 당시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던 때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친당(親唐)정책을 택하였던 시절이었다. 선진국인 당나라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의 힘을 기르고자 노력하던 신라는 당나라의 학자를 초빙하였는데, 669년(문무왕9)에 바다를 건너오신 분이 월봉 시조님이시다. 마침 고구려와의 전쟁이 심하여 일시적으로 상주(尙州)에 머물러 계시다가 신라 조정에서는 이듬해 상대등 부한(夫邯)의 건의로 상원정사(上元正舍)에 빈객부(賓客府)를 설치하여 선생을 맞이해서 국시문정(國是文正)이라는 강의를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라에 중국문장(中國文章)에 대해 밝게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서, 오직 설총(薛聰)만이 약통(略通)하므로 그를 헌병구임(軒屛俱任)에 두고 가르침을 베풀었다. 문법(文法) · 문예(文藝) · 문정(文正) · 예속(禮俗) 등의 의역(意譯)과 선전(宣傳)의 행사를 자세히 하여 육례(六禮)를 회통(會通)하고 구경(九經)의 대지(大旨)를 밝혀서 유학(儒學)과 예교(禮敎)를 진흥시키고 민속의 순화(醇化)를 위해 지방을 순회하시었다.
처음에 동쪽으로 오실 때에는 신라에서 문화전달의 임무를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가 그 성과를 황제에게 보고하고 고향인 하남(河南) 땅에서 조용히 지내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관계가 점점 험악해져 전쟁이 계속되므로 문화사업 또한 지지부진하였을 뿐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본국인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 정벌에 내응하기 위해 신라에 여러 해를 계속 머물다가, 신라 사람의 권유로 부인을 맞이하니 그 배위(配位)가 장씨(張氏)이다. 676년(문무왕16)에 선생의 아드님이신 헌주(軒柱)가 가유현 현주(縣主)에 임명되고 후손이 이어지면서 답달비군(荅達匕郡), 곧 상주(尙州)에서 대(代)를 이어 살게 되었다.




고려상서 좌복야 온수군 휘 운(高麗尙書 左僕射 溫水君 諱 雲)

서기 889년(신라·진성왕3)에 멸망한 옛 백제의 유민(遺民)인 견훤(甄萱)이 스스로 후백제를 세우고, 926년(경애왕3)에 신라를 습격하여 서라벌을 함락하면서 왕과 귀족들을 살해하였다. 이때 방씨 문중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임을 당했는데 하늘이 굽어 살피셨는지 오직 온수군 운(雲)만이 목숨을 건져 겨우 10세의 나이에 다행히 탈출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유랑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공께서는 천재를 발휘하여 재덕(才德)을 갖춘 문무쌍전(文武雙全)의 대장부로 성장하였으며 왕건의 후백제 정벌에 참여해서 크게 전공(戰功)을 올렸다. 또한 고려 초기에 요(遼)나라가 침공했을 때 결정적인 군공(軍功)을 세워 963년(광종14)에 상서 좌복야의 고위관직에 올랐고, 994년(성종13)에 온수군(溫水君)의 봉작을 받았으며 온양군 동쪽 8리 쯤에 위치한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과안산 아래에 자리 잡고 그 산을 배방산(拜方山)이라 이름하였다. 곧 「방씨(方氏)에게 절하는 산」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 자손이 온양(溫陽)에 세세손손 오래 살았으므로 온양은 방씨의 관향(貫鄕)을 상징하는 종읍(宗邑)이 되었다. 이와같이 온수군 이래 방씨는 고려의 세록지신(世祿之臣)이 되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다가 온수군의 14세손인 온천부원군(溫泉府院君) 언휘(彦暉)가 충목왕의 국구(國舅:왕의 장인)가 되었다. 이에 공민왕 때에 선대 왕의 증영미수(曾榮未遂)를 계승하고자 배방산의 제택(第宅)을 보호하기 위해 성첩(城堞)을 쌓고 그 안에 온수군의 묘원(墓園)을 옮겼던 소중한 터였다. 그러나 고려 말엽에 이르러 온수군의 16세손인 태부경(太府卿) 유정(有程)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름에 당당히 불응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자 모든 관직을 강등시키고 사패지를 몰수하였다. 아! 온수군 이하 모든 유택(幽宅)은 파괴되고 묘비를 비롯한 많은 석물들이 철폐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배방산(拜方山)은 고려 왕조가 방씨의 고유한 특권을 인정하여 ‘방씨에게 절하는 산’이라는 뜻으로 이름하였는데, 배(拜)를 배(排)자로 바꿔 배방산(排方山)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훗날 1714년(숙종40)에 온수군의 26세손 참의공 최일(最一)이 소계거정(訴啓擧旌)하였으나 비답(批答:임금의 답변)은 ‘선대 왕이 정한 사유를 뒤집을 수 없다’며 다만 ‘방(方)을 방(芳)자로 고치라’ 하여 그때부터 배방산(排芳山)이라고 불러 면(面)의 명칭도 따라서 배방면(排芳面)이 되고 말았다.
오호라!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고(桑田碧海) 해와 달도 뜨고 지는데(日月盈昃)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와 같이 억울한 경우를 당하고 기나긴 세월이 지났건만 우리 후손들은 통한(痛恨)을 씻어내지 못한 채 기형적(畸形的) 상태를 보면서 수백 년을 보내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 씨족이 분발하여 서로 호응하고 의견을 모아 배방산 옛터에 단(壇)을 쌓고 묘(墓)를 옮기는 정민지역(貞珉之役)을 하고자 분주하니 우리 방씨 문중에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종사재기(宗祀齊記)·비명(碑銘)·행장기(行狀記)


시조(始祖) 한림학사(翰林學士) 월봉공(月峯公) 방지(方智)

【월봉선생 실기 서문(月峯先生實記序)】

천지(天地) 간에 문명(文明)의 기운(氣運)은 머물지 않고 돌고 돌아 자연법칙의 운행이 드러나고 나타남에 있어 앞뒤의 차이가 있으나 일정한 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넓은 범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운동법칙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하늘의 운행을 대신하여 행하는 것을 천직으로 맡아 하는 존재가 있으니 곧 사람(인간)이다. 그러므로 옛날 중국에 위로는 태호복희 · 염제신농 · 황제헌원 · 요 · 순 · 탕 · 문 · 무왕 등의 제황(帝皇)이 있으며, 아래로는 익직 · 계 · 이윤 · 주공 · 공자 등의 성현(聖賢)이 있어 예악과 문물 그리고 예전과 문장 또 법률과 제도가 차례차례 틀을 잡아 세계3대문명의 으뜸이 되었다.
동쪽의 우리나라는 단군성제가 즉위한 때가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대로 그 문화의 성향은 마땅히 고유문화가 유지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고, 동북부여는 그 문화가 중국의 하(夏)와 은(殷)의 후예인 기(杞)와 송(宋)과 비슷하여 그 계통을 판가름할 수가 없다. 기자(箕子)가 동쪽 땅으로 와서 8조(八條)의 법으로 백성을 교화시켜 문화가 상당히 발전하였을 것인데 위만(衛滿)이 쳐들어와 많은 문적이 불타거나 없어지고, 이어서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삼국시대가 열려 잦은 전쟁으로 예법과 풍습이 정돈되지 못했다. 이러할 즈음 신라 문무왕 때(서기669년) 당(唐)나라에서 한림학사로 계시던 월봉 방지선생이 황제의 명을 받고 신라에 오셨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과 더불어 예(禮)와 의(義)를 강론하시며 6례(六禮)를 회통(會通)하시고 당시 신라의 말(言語)로 9경(九經)을 해석하시어 이두(吏讀)로 써서 관부(官府)에 통용케 하였다. 미개한 우리나라의 문화를 일깨우는 효험을 냈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할 일을 방공(方公)께서 사양을 않고 대신하였으므로 그 공로가 크다 하겠다.
그때부터 중국의 문물과 교학이 점점 우리나라에 보급됨에 따라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경전과 사기(史記)와 같은 역사책을 비롯한 백가(百家)의 서책이 나라 안에 보급되었고 집집마다 책 읽는 소리가 나니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명군석보(明君碩輔)와 도학문장(道學文章)의 선비들이 앞을 다퉈 배출되어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중국과 견주게 될 만큼 융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넓디넓은 하늘과 땅 사이의 자연계에서 바다는 그 근원이 작은 샘에서 비롯되고 농사는 천하지대본이지만 작은 밭 한 뙤기에서 시작된다. 바야흐로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를 헤아려보면 마치 바다에 비유한 작은 샘물과 같고 큰 농사에 비유한 작은 밭과 같이 미개(未開)하였으나 도랑을 쳐서 물길을 내고 척박한 땅을 일구어 밭을 만들 듯이 월봉선생께서 육례회통과 구경해의를 통해 문화를 일으켰으며 동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에 와서는 여러 임금께서 끊어져가는 학문을 일으키고 퇴폐해진 윤리기강과 도덕을 바로 잡으신 월봉선생의 공을 기려 그 뜻을 높이 경모하는 뜻에서 방성(方姓)을 가진 사람은 모두 월봉선생의 후예이니 황민(皇民)으로 우대하여 잡역을 시키지 말고 군포의 납세를 면해주도록 교지(敎旨)를 내렸다. 이는 문(文)을 숭상하고 현인(賢人)을 경모하는 의미가 있으며 지극히 당연한 처사라 하겠다.
이제 지극히 유감스러운 것은 세대가 너무 멀어서(1,300여년) 고사(故事)를 기록한 문적이 적고 향리에서 배운 제자들이 선생의 명성을 사모하고 공의 은덕을 칭송하는 글들을 많이 전해 놓지 못한 점을 홀로 한스럽게 여기니 이는 실로 우리 유교의 문화사상에 큰 흠이 된다 하겠다.
그러나 삼가 방씨삼강록(方氏三綱錄)을 살펴보건대, 선생의 후손에 효자로 기록된 사람이 28인이며 충신에 오른 사람이 12인이고 그 외 공신과 문학인 · 은일처사 · 효부 · 열녀 등이 대대로 이어져 기록에 끊임이 없다. 정학선생(正學先生:孝孺) 때에 이르러서는 도덕과 문학이 명조(明朝)의 으뜸으로 떨쳤으며 9대멸문(九代滅門)의 화(禍)를 당하면서도 추호의 굴함이 없이 정충특절(貞忠特節)을 지키신 그 대쪽 같은 절개는 해와 달빛이 다투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며 우주에 휘황하게 밝히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또한 생각컨대 월봉선생의 의관과 장식을 깊이 간직한 증거가 역력함이다. 오늘날의 경남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치술령에서 내려 뻗은 주천잔계(舟川棧谿)의 구릉(丘陵) 위에 잠드셨으니 산세는 용이 꿈틀거리는 모양과 같이 뻗어내려 있고 재실누각(齋室樓閣)은 수꿩이 날개를 벌리고 푸르륵 나는 듯이 화려무쌍하게 신축되었다. 수백 년 동안 오래도록 내려오면서 제향(祭享)이 날이 갈수록 경건하고 엄숙하며 성대하여져 가니 이는 월봉선생의 유풍(遺風)과 쌓아놓은 은덕(恩德)이 날이 갈수록 승화하는 징조라 하겠다. 시향(時享) 때마다 많은 후손들이 묘역에 구름같이 모여 합석하고 선생의 대업을 추모하며 돈목의 정담을 나눠 자손으로 태어난 긍지로 뿌듯하여 만족감에 잠긴다. 지난번에 여러 인사(人士)가 영조대왕의 교지와 선생이 남겨놓은 사적(事蹟)과 묘갈비문 및 재지(齋誌)에 기재된 문장과 근세 제현들이 월봉선생을 사모하여 지은 시와 문장을 수집·정리하여 선생의 실기(實記)를 후세에 전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그 실기의 서문을 꾸며달라고 부탁하니 뒷사람을 위함이라 생각하며 늙은이가 큰 폐를 끼치지 않을까 감히 승낙하기 두려운 터이다. 또한 월봉선생께서 관직에 계실 때의 자료나 밝혀진 복력(復歷)과 선행(善行) 그리고 덕행 등이 고증할 바가 없는지라 진실로 자기 생각들을 망령되이 짐작하여 억설(臆說)을 함으로써 그릇된 죄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작편(作篇) 즉 선생의 실기가 동방문교(東方文敎)의 효시가 되는 월봉선생의 업적이 실리는 일은 매우 분명한 일인 만큼 그 영광이 병연하게 빛날 것이며, 또한 이 실기가 동방 유교문화의 비조(鼻祖)의 행장(行狀)을 엮은 것이니 더욱 큰 다행이다. 그러므로 감히 헛된 말을 못하고 경건히 글로 써서 영손(令孫)들이 부탁한 서문을 마감한다. 처음부터 이 일을 주관하신 분은 좌규(佐奎) · 문택(文宅) 두 분이고 서문을 부탁하신 분은 상운(相運)임을 밝힌다. 선조를 숭상하고 호위코자 하는 그 효심을 존경하며 아울러 기록해 둔다.

1957년(丁酉) 영가(永嘉) 권규(權相圭) 삼가 짓다




【월봉선생(月峯先生) 묘갈명(墓碣銘) 병서(竝書)】

계림(鷄林) 남쪽(경주 남방 50리 쯤 울산군 두동면 봉계리) 잔계(棧谿)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모신(甲坐) 묘원(墓園)의 봉분 높이가 4척(尺:현재는 12尺)이나 된다. 이 큰 무덤이 대당(大唐)의 한림학사이신 월봉선생의 가성(佳城)이다.
돌아가실 당시에는 큰 비석이 있었을 것이고 이수(螭首)에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었을 터, 그 규모는 매우 크고 우람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1,3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선생의 생일(生日)과 기일(忌日) 그리고 배위(配位)에 관한 기록은 물론 관직이나 업적에 대해 자세한 고증이 없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월봉선생의 묘소에는 원래의 비석이 있으나 풍우(風雨)에 씻겨 문자(文字)가 불명(不明)하여 후손인 대경(大慶) 석규(奭奎) 석호(錫滈) 우영(佑永) 두환(枓煥) 등은 선조의 아름다운 업적이 실전(失傳)될 것을 뼈저리게 느껴 널리 선생의 유적을 탐색하고 표명(表銘)의 중핵(中核)을 가려내어 여러 종친(宗親)들과 협의하였다.
앞으로 선생의 유덕(遺德)을 글로 엮어 돌에 새기어 산소 왼쪽에 세우고자 멀리 경기도 여주까지 나를 찾아와 자료를 내놓으면서 명문(銘文)을 지어주기를 청하니 이 중구(中久)는 무문비재(無文菲才)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끝내 부탁하므로 성의(誠意)를 다하여 살펴 헤아려본다.
월봉선생의 성(姓)은 방씨(方氏)요 휘(諱)는 지(智)이며 호(號)는 월봉(月峯)이다. 계출(系出)은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후예로 유망씨(楡罔氏)의 장자(長子)이고 휘는 뇌(雷)이시며 하남(河南)땅 방산(方山)지방에 봉작(封爵)됨에 따라 방성(方姓)으로 사성(賜姓)되어 자손이 하락(河絡) 사이의 땅에 대대로 살아왔다. 분여(分輿)와 세웅(世雄)과 도명(道明) 그리고 군강(君講)으로 이어졌으니 군강은 월봉선생의 아버지이시고 차례로 조(祖) · 증조(曾祖) · 고조(高祖)가 되신다. 뇌로부터 134세손이신 선생은 하남 땅 방산의 정기(精氣)를 타고 탄생하시어 총명하고 도량이 넓으시며 뛰어난 천재로서 과거시험에 장원(壯元)을 하였고 벼슬에 나아가 한림학사가 되시었다.
월봉선생께서는 667년(唐·고종) 9월에 당나라의 침입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고 설인귀가 고구려 땅에 주둔할 때 동쪽 나라의 민속이 사납고 거칠며 예의가 없다고 여겨 본국에 풍속을 교화 할 학자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따라서 당나라 조정에서는 한림학사인 월봉선생을 천거하여 선생께서 황명(皇命)을 받들어 신라에 오시게 되었다. 문학(文學)을 일으키고 예의(禮儀)를 가르치고자 신라 신문왕 때에 설총(薛聰)과 같이 유교 서책인 9경(九經)을 이두(吏讀)로 풀이하여 학문을 진흥시켜서 나라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선생께서는 경전(經典)의 해석과 제도(制度)를 정비하고 답달비군(尙州)으로 물러나 후학들을 훈도하시다 하세(下世)하셨다. 아드님 헌주(軒柱)는 가유현주(嘉猷縣主)가 되었고, 그 다음이 길정(吉正)이요, 다음은 동량(東亮)으로 대정(大正)을 지냈으며, 다음으로 보혁(甫赫)은 평안군(平安君)에 봉작되었고 다음으로 공요(公瑤)는 화령군(化寧君)의 봉호를 받았다.
918년에 왕건(王建)이 고려왕조를 세워 태조(太祖)에 즉위한 뒤, 운(雲)께서는 고려를 섬기어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에 오르고 군공(軍功)이 탁월하여 온수군(溫水君)에 봉작되었으며 사신(使臣)으로 송(宋)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한림학사의 칭호를 받았다. 중시조(中始祖)이신 운(雲) 선조님 이후 열두 분이 연이어 군(君)의 봉호를 받았는데 온수군의 13세손 적(迪)께서 태상경(太常卿)을 지내고 공훈이 커서 군위군(軍威君)에 봉작되었다. 그 후손으로부터 관향(貫鄕)이 ‘온양(溫陽)’에서 처음으로 ‘군위(軍威)’로 분관(分貫)되었다.
15세손 순(恂)께서는 고려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되자 공께서는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에 따라 태조(이성계)의 부름을 마다하고 광주(廣州)로 숨어 살았는데, 조정에서 예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돌아가시니, 뒷날 문의(文毅)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아호는 만송당(晩松堂)이다. 군위군의 7세손 유령(有寧)께서는 관직이 병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선원(善源) 김맹성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 두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교의 이념을 이어받아 세상에 이름을 떨치었다고 주세붕(周世鵬)이 묘비(墓碑)에 새기어 놓았다.
1762년(영조38)에 간관(諫官) 류건(柳健)이 주청한데 대해 임금께서 답하시기를 ‘황조(皇朝)의 한림학사인 방지(方智)는 신라에 건너와서 우리 말(方言)로 9경(九經)을 풀이하고 후생을 가르쳤으며 또 이찰(吏札)을 만들어 관부(官府)에서 사용토록 하였고, 유교의례로 풍습을 교화하였으니 방학사(方學士)의 덕업(德業)을 누구인들 우러러 받들지 않으리오!’ 하시고 월봉선생의 후손들을 대우하여 납세를 감면하고 군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사간(司諫) 류건이 호남지방에 갔을 때 수령들이 방씨에 대해 부당한 과세를 하였음을 장계(狀啓)로 올리자 임금께서 예조에 하명하여 방학사의 후예인 황민들에게는 우대를 하라는 교지(敎旨)를 특별히 내렸다.
월봉선생께서는 동방의 유조(儒祖)로서 큰 공덕(功德)을 남겼으나 천여 년의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병란(兵亂) 등으로 사적(事蹟)이 멸실되었으니 한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선생의 유덕(遺德)이 높았으므로 영조대왕께서 특별히 교지를 내려 방성(方姓)을 우대하라고 하였으니 그 업적의 빛이 백세(百世)에 비추는 듯하다.
이제 선생의 말씀과 풍모를 오늘 날 다시 보는 듯한데 이는 선생의 덕업이 더 없이 크기 때문이다.
비명(碑銘)에 쓰기를 “대당(大唐)의 한림학사이시고 동방의 유종(儒宗)이로다. 영조대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가히 신명(神明)에 물어 받들 것이다. 뛰어난 재질을 가지신 한림(翰林)이시어! 중화(中華)의 문화를 품고 이 땅에 오셔서 대공(大功)을 이룩하시고 이 뫼에 잠드셨는고! 오동나무는 적막한데 차가운 달이 배회하도다. 이제 새로 글을 새기니 상서로움이 무궁하리라. 오호! 선생의 유풍(儒風)은 산수(山水)와 같이 푸르고 넓도다.

1913년(癸丑) 가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서학교수(西學敎授) 

    여강(驪江) 이중구(李中久) 삼가 지음(謹撰)





【월봉선생(月峯先生) 묘지명(墓誌銘)】

월봉선생께서 우리나라에 건너오신 것은 아득한 옛날인 당(唐)나라 고종황제의 연호가 총장(總章)2년일 때입니다. 선생께서는 동방(東方:신라)에 오셔서 학문(學問)을 불러일으키고 예의(禮儀)를 가르치어 그때의 풍속을 문화적으로 향상시킴으로써 우리나라 문교(文敎)의 조종(祖宗)이 되셨습니다.
선생께서 하세(下世)하신지가 지금으로부터 1,300년이나 되었습니다. 선생은 중국 하남(河南) 땅에서 태어나시어 유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등을 강명(講明)하시고자 우리나라에 오시었습니다. 선생의 학풍(學風)을 살펴보면 과연 아름다운 경지에 오른 대학자이셨습니다. 어느 날 공의 예손(裔孫)인 상운(相運)씨가 집에서 보관해 오던 보첩(譜牒)과 근세에 여러 선비들이 쓴 조상님들의 서문(序文)과 갈문(碣文) 등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묘지(墓誌)를 써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시골 선비로서 늙고 병들어서 이미 붓과 벼루를 대한지가 오래 되어 사양하였으나 간곡히 부탁하므로 상운씨의 정성에 감동하여 부득이 몇 마디 말로 글을 엮어 훗날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諱)는 지(智)이시니 본래는 중국 하남성 방산(方山)이 고향이며 염제신농씨의 후손으로 유망황제의 장자인 뢰(雷)를 방산에 봉작함으로써 방성(方姓)이 되었습니다. 고조(高祖)는 분여(分輿)이고 증조(曾祖)는 세웅(世雄)이며 (祖)는 도명(道明)인데 부친은 군강(君講)으로서 아호와 관직 등의 행적은 자세히 알 길이 없어 엮지 못했습니다. 아드님이신 헌주(軒柱)는 가유현주(嘉猷縣主)이시고 그 다음은 길정(吉正)이고 다음은 동량(東亮)이고 다음은 보혁(甫赫)이신데 봉호(封號)가 평안군(平安君)이시며 다음 공요(公瑤)는 봉호가 화령군(化寧君)이시니 자손들을 다 공(公)의 묘원(墓園)에 모시었고 화령군만은 월성군 남면 굴성리에 봉안(奉安)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 와서 온수군 휘 운(雲)이 계시니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이시고 그 뒤로 열두 분이 군(君)의 봉작을 받으셨습니다.
중간에 군위(軍威)와 태안(泰安)으로 분관(分貫)되었으나 모두 시조이신 월봉선생의 후예들입니다. 선생께서는 학문(學問)을 일으키시고 윤강(倫綱)을 바로 세워 그 공덕(功德)이 매우 크므로 여러 임금들께서 총애와 포상을 하셨으니, 방성(方姓)으로 하여금 황민(皇民)으로 우대하라는 칙유(勅諭)를 예조(禮曹)에 하명(下命)셨습니다. 그러니 과연 국태민안의 선정을 베푸사 성군(聖君)들이 문관(文官)인 진신사(縉紳士)에 대한 예우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의 후손들께서도 충효(忠孝)는 송죽(松竹)과 같이 굳세고 문장(文章)은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며 중위급(中位級)의 벼슬을 한 문무(文武)의 관리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효부와 열녀가 줄을 이었습니다.
또한 월성군 치남면 주천잔계(舟川棧谿)인 갑좌원(甲子原)에 선생의 분묘가 엄연히 실존하고 있으니 그 경사스러움이 만족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선생의 그 크신 공적(功績)과 유택(遺澤)이 영세무궁토록 영수(永垂)하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이와 같이 묘지(墓誌)를 엮는 내 소회(所懷)에 적중함은 선생의 후손들이 조선(祖先)에 대한 지효적(至孝的)인 모습에 더욱 감탄하여 만족감을 가질 뿐입니다. 이어서 묘지를 쓰노니, 본래 당나라에서 탄생하시어 마침내 신라에 건너오셔서 처음으로 예의(禮儀)와 학문(學問)으로 밝혀주시니 여러 임금님들께서도 치하하고 포창(襃彰)하셨습니다. 문조(文祖)로서의 그 위대한 자취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모두가 외우고 전하니 내 이에 유실(幽室)의 묘지(墓誌)를 엮으니 산천(山川)마저도 더욱 경관(景觀)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1957년(丁酉) 풍산(豊山) 류승우(柳承佑) 씀(撰)





【해동유원(海東儒苑) 총론(總論)】


한림원 태학사 설총이 승문원 태학사 방천경과 더불어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문학과 예법의 성함을 보고 동방에 베풀어 나쁜 풍속을 모두 고치려고 생각하여 방천경은 육례회통(六禮會通)을 채집하고 설총은 구경대의(九經大義)를 외워 와서 동방사람들이 비로소 문학예법이 있음을 알았다. 학사가 화산 남쪽에 은거하여 후진을 가르쳐 풍속을 바로 잡았으니 당시 사람들이 설총을 화산선생(花山先生)이라 칭하고 방천경을 화천선생(花川先生)이라 칭하였다.



봉담회고시(鳳潭懷古詩)
봉담에서 옛날을 생각하며

옛적에 신라시대에는 풍속이 어두워서 신사(神祠)에서 피리 불고 불당(佛堂)에서 범패를 했는데 평화로운 원기를 찾아서 용봉이 함께 오는 듯 홍유후(弘儒侯)가 탄생하여 청수한 정기를 모아 백일(白日)처럼 청명하여 주양(朱陽) 땅에 비추었네. 태평성세 만난 것은 이윤(伊尹)과 여상(呂尙)같은 보필일세. 78년 한림원 학사로 강상(綱常)을 바로 잡았으며 아름다운 지모(智謀)로 왕도(王道)를 돕고, 애달픈 충간(忠諫)은 천문(天門)을 열었네. 당당한 방학사(方學士)는 인(仁)을 도와 함께 보좌하여 중화문화를 본받아 해동나라 깨우쳤네.
경제술책 연구하니 날마다 칭송 높았고, 의리학문 정묘하여 방언으로 구경 뜻 밝혀서 유학자의 중책 맡아 한 방향으로 가르쳤네. 광낭(狂浪) 밑에 주초(柱礎) 묻고 넓고 큰집에 기둥 세워 높고높은 심화정(心花亭)은 중앙으로 들어섰는데 쟁쟁하게 들리는 옥 굴리는 소리 성인(聖人)의 문장인줄 알았네. 풍속을 바꾸어 큰 공을 이루고 기자(箕子)같은 성인의 뒤를 따라 춤을 추웠네.
나 혼자 봉황당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머리를 들어서 유허지를 물어보니 옛날 전설이 자상하도다. 동방의 천년 전에 어느 뉘가 홍유후(弘儒侯)처럼 어질꼬. 동방의 천년 뒤에 뉘가 홍유후처럼 빛날꼬. 초조하게 옛을 생각한 나의 심사 누가 알아주리.

황백산석정(黃栢山石正)





【중시조 온수군(溫水君) 휘(諱) 운(雲)】
고려개국공신온수군휘운신단비갈명(高麗開國功臣溫水君揮雲神壇碑碣銘)

공(公)의 휘(諱)는 운(雲)이시니 당(唐)나라 한림학사 휘 지(智)의 후손(後孫)이다. 한림학사의 처음 휘는 천경(千慶)이시고 호는 월봉(月峯)으로 선생의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은 당세에 그 이름이 떨쳤으므로 신라에서 요청하여 669년(唐·總章2)에 황명(皇命)을 받들고 동래(東來)하여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과 더불어 9경(九經)을 해의(解義)하며 6례(六禮)를 회통(會通)하여 도덕(道德)과 윤리(倫理) 그리고 예의(禮儀)에 대한 글을 엮어 강론함으로써 이 땅에 큰 공을 세우시고 상주(尙州)로 내려가 사시므로 우리나라에 방성(方姓)이 처음 있게 된 것이다.
그 후 자손이 면면히 이어지고 높은 벼슬과 큰 공을 세워서 이름 난 가문이 되었는데 마침내 국운(國運)이 기울어 흉적 견훤(甄萱)의 란(亂)으로 왕가(王家)는 물론 우리 방씨(方氏) 일문(一門)이 살육을 당하였다. 그때에 운(雲) 선조님은 10세의 어린 나이로 산으로 들어가 피했는데, 군졸들이 사방으로 뒤쫓아 왔으나 하늘이 도와 갑자기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피신할 수 있었다. 이 어찌 천지신명의 굽어 살피심이 아니겠는가! 공께서는 타고난 기품이 비범하여 비록 역경에 처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에서도 학문과 무술의 연마에 힘써 장상(將相)의 자질을 갖추었다. 마침내 고려왕조에 나아가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위로는 국가대업을 이룩함에 성공하고 아래로는 가문(家門)의 뼈에 사무친 원수에 보복하니 그 특출한 공훈과 위대한 업적은 온 세상에 높이 떨쳤다. 이로해서 논공행상에 따라 공은 좌복야(左僕射)에 제수되고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졌으며, 대대로 세습하여 봉작을 받으니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아 당세(當世)의 거벌(巨閥)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니 국운(國運)이 바뀌어 새 왕조가 열려 태조(이성계)가 등극하였다. 공의 16세손인 태부경(太府卿) 유정(有程)이 절개를 지키고자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며 응하지 아니하므로 그 화(禍)가 천양(泉壤:根源地)에 미치게 되어 온수군 이하 역대 묘원(墓園)의 흔적이 없어져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아울러 배방산(拜方山)의 이름을 배방(排方)이라 고쳐 부르니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 그 후 숙종 때 와서야 참의공 최일(最一)의 상소로 겨우 은전(恩典)을 내린 것이 지금까지의 이름인 배방(排芳)으로 고쳤을 뿐이다. 후손된 입장에서 억울하고 침통하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어찌 하랴. 그러나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에도 움싹이 돋듯 나라 안에 흩어져 사는 자손이 10여만 명이 넘을 정도로 번연(繁衍)하였다. 5백 년 동안 침체하여 큰 인물이 없었다고 하나 충효(忠孝)와 의열(義烈)로 사람들의 눈길을 놀라게 한 분들이 40여 명이나 되니 어찌 명문(名門)이 아니라 하겠으며, 이러한 것은 모두 선조님의 유훈(遺訓)과 유덕(遺德)에서 비롯되어 이루어진 경사(慶事)일 뿐이다.
공(公)의 35세손인 규환(奎煥)은 뜻이 있는 분으로 어려운 역경에서도 일어나 안으로 수신제가(修身齊家)하고 밖으로 공익사업(公益事業)을 하여 업적을 올렸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일가(一家) 간의 돈목(敦睦)을 위해 온양방씨화수회(溫陽方氏花樹會)를 만들었다. 또한 조상을 받들고 일가 사이에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임을 밝히며, 중시조(中始祖)의 신단(神壇)을 새로 모시고 족보(族譜)를 다시 엮어서 발간하는 일은 방씨가문(方氏家門)이 오늘날 마땅히 힘써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여러 일가친척들은 모두 입을 모아 옳다고 격려하였으며, 멀고 가까운 일가들이 힘을 모아 성심껏 노력하고 간부들은 각기 맡은 일에 충실하여 겨우 2년 만에 족보의 편수를 마쳤다. 또한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 용화리에 중시조 신단을 모시고 비석을 세워 선령(先靈)을 평안하게 봉안(奉安)하였다.
문중(門中)의 대사(大事)를 마친 규환씨가 온수군의 사적(事跡)을 내게 가져와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청탁하므로, 나는 본래 그의 인품을 존경하였고 어려운 가운데에도 부지런히 청하는 성의를 보고 사양을 할 수 없어 부득이 받아들여 글을 엮는다.
“거룩하신 월봉선생은 당나라로부터 신라에 건너와서 문화가 뒤떨어진 이 땅에 문학(文學)을 밝히시고 새로이 예모(禮貌)있는 누리를 만드셨네.
신라 마지막에 이르러서 견훤이 들이닥쳐 도륙을 할 때, 방가일문(方家一門)은 쑥대밭이 되고 나이 어린 공께서 재주도 많으시어 문무(文武)를 갖추사 몸을 지렛대 삼아 태조왕건(太祖王建)을 도우니 대공(大功)을 세워 나라에 바쳐서 온양(溫陽) 땅을 식미(食米)로 봉토(封土)받았네.
뒷날 후손들이 높은 벼슬로 가성(家聲)을 드날리더니 나중에는 또 세상이 뒤집혀 천양(泉壤:根源地)의 화(禍)를 맞았네.
묘원(墓園)은 전(傳)함이 없어 찾을 길이 없고 춘추향화(春秋香火)가 끊겨 그 원한을 풀 길이 없더라.
긴 세월에 죽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나라도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천지(天地)도 상전벽해(桑田碧海) 하는도다.
방손(方孫)은 신단(神壇)을 모시고 비석(碑石)을 세우며 재실(齋室)을 지어 추모의 정성을 다해 해마다 향화(香火)를 올리네.
설산(雪山)은 우뚝 솟아 있고 온수(溫水)는 펄펄 끓으니 천만년 이르도록 기리기리 조상을 잊지 마세.”

                                  죽계(竹溪) 안인식(安寅植) 삼가 지음(謹撰) 
1960년(庚子) 6월 일
                                  공(公)의 33세손 헌용(憲容) 삼가 씀(謹書)
            화수회장(花樹會長) 공(公)의 35세손 규환(奎煥)
       설단위원장(設壇委員長) 공(公)의 38세손 일영(一榮) 세움(竪立)





【온수군(溫水君) 설단(設壇) 고유문(告由文)】


엎드려 아뢰옵니다.
오직 온양(溫陽)은 우리 방씨(方氏)의 관적(貫籍)입니다. 설아산(雪蛾山) 밑에는 온수군께서 거처하시던 저택이 있었습니다. 온수군께서 태어나심에 용자(容姿)가 수려(秀麗)하셨고 총명(聰明)과 예지(叡智)가 드러났습니다. 10세의 어린 나이에 난(亂)을 당하심에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는 와중에서도 하늘이 도우셔서 천행(天幸)으로 액(厄)을 면하셨습니다.
문장(文章)에도 능하시고 무예(武藝)에도 탁월하시어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총신(寵臣)이 되셨습니다. 재예(才藝)를 더욱 연마하고 높은 덕(德)을 쌓으셨고, 거란(契丹)과 여진(女眞)을 물리친 공이 크셔서 온수군의 봉호(封號)를 받으셨습니다. 뒤이어 더 많은 업적(業績)을 쌓으셔서 국책(國策)을 크게 빛내셨습니다.
후손(後孫)들이 줄을 이어 번창하여서 군호(君號)를 받은 분이 여섯이나 되고, 더욱이 과안산(過雁山)을 배방산(拜方山)이라 이름을 바꿔 하사(下賜)받으시고 공민왕께서는 배방산성(拜方山城)이라고 성(城)의 명칭을 내리시어 그 명성(名聲)이 위연(魏然)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온양과 아산 그리고 신창의 3읍(邑)을 식채지(食菜地)로 하사받으시어 그곳에 정자(亭子)와 묘원(墓園) 그리고 재각(齋閣)을 드리우니 그 빛이 혁혁하여 당세(當世)에 으뜸이었습니다.
그 후 세상의 운세(運勢)가 바뀌어 조선왕조(朝鮮王朝)가 개창(開創)하였으나 끝내 고려(高麗)에 대한 충성(忠誠)을 붙들고 마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가운(家運)이 어둡고 막히게 되어 마침내 모든 유적(遺蹟)들이 인멸(湮滅)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5백년이 내려오도록 향화(香火)의 길이 막혔으니 사림(士林)들이 크게 탄식하고 지나가는 나그네들도 애석해 했습니다.
늦게나마 후손들이 떨쳐 일어나 여러 종친들이 화수회를 조직하고 뜻을 모아 기해보(己亥譜)의 역사(役事)를 마치고, 계속하여 신단(神壇)의 터를 마련하고 초혼(招魂)을 하여 봉안(奉安)할 때 옛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갖가지 감회(感懷)가 애 끊는 듯합니다. 오늘 자손들이 수없이 다투어 모여서 추모(追慕)의 정(情)에 잠길 때 축문(祝文)에 따라 생주(牲酒)를 따르며 명복(冥福)을 비오니 선조(先祖)님의 정령(精靈)이 이에 흠향(歆饗)하시어도 성설(盛設)은 아니로되 격(格)에 맞는가 합니다.
1960년(경자) 이른 가을 후손 상운(相運) 삼가 씀





【설단(設壇)후 수비(竪碑) 고유문(告由文)】


우리나라의 방성(方姓)은 월봉시조(月峯始祖)로부터 비롯되니 예의(禮儀)를 가르쳐서 동방(東方)의 낮은 풍속(風俗)을 말끔히 고쳤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으시고 마침내 문화의 세상으로 크게 바꿔 놓았습니다. 그 후 온수군(溫水君)이 태어나심에 선광(先光)을 본받아 용자(容姿)가 특이하셨고 총명(聰明)과 지혜(智慧)는 그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신라(新羅)의 성세(盛世)애 유복(裕福)하였으나 견훤(甄萱)의 난(亂)으로 세가(世家)에 화(禍)가 덮쳐 우리 방문(方門)은 거의 멸문(滅門)에 가까웠습니다. 다행히 천우신조(天佑神助)로 공께서 홀로 액(厄)을 면하였습니다. 드디어 고려태조(高麗太祖)를 섬기어 크게 이름을 떨쳤으니 사명(使命)을 받으러 송(宋)나라에 갔을 때에는 중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 벼슬을 더 받았습니다. 위계(位階)가 당상관(堂上官)에 오르시고 마침내 나라에서는 온수군(溫水君)의 작호(爵號)를 내리시어 온양·아산·신창 3읍을 식채지(食菜地)로 받으셨습니다. 후손(後孫)이 번연(繁衍)하여 그 훈업(勳業)을 이어받아 당세(當世)에 빛나더니 여말(麗末)의 정치적 변혁을 당함에 벼슬을 마다하고 망복충정(罔僕衷情)을 지켰습니다.
조선(朝鮮)이 개국한 후 화(禍)가 심하게 닥치더니 만월대(滿月臺)는 잿더미로 변하고 성(城)터는 쑥대밭이 되었으며 묘릉(墓陵)은 풀밭이 되고 말았으니 춘추(春秋)가 바뀌어 몇 백 년이 지나 눈을 뜨고 찾아도 고증할 길이 없으니 후손들의 애끓는 마음을 어찌 형언(形言)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여러 종친들이 한자리에 모여 신단(신단)의 터를 잡고 초혼(招魂)을 하여 비석을 세우고 정성을 다해 향화(香火)를 받들어 올리면서 그 침울했던 서러움이 끓어오르니 성령이여 감응(感應)하시고 영원토록 평안(平安)하소서!
후손(後孫) 상운(相運) 삼가 씀
 




온수재(溫水齋) 창건기(創建記) 발문(跋文)

 

! 방씨(方氏)의 후손들이 천백 년이 지나간들 어찌 온수군(溫水君)의 유사(遺事)를 하루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배방(拜方)으로 된 것이 끝내 배방(排方)으로 달라지니 일인지신(一人之身)이나 전후억양(前後抑揚)이 어찌 이러하며, 그 돌아봄이 다르구나. 지금의 산() 이름이 배방(排芳)으로 바뀐 것은 숙종대왕의 특별한 은전(恩典)이다.

삼읍(三邑)의 식채(食菜)를 받음과 묘원유적(墓園遺蹟)이 그 하나도 생각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능곡(陵谷)이 역천(易遷)하여 거의 오백 년이나 오랜 세월동안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하더니 후손들이 손 모아 분발하여 지난 1958(戊戌)에 온양읍 용화리 뒷 산록의 기절(奇絶)한 곳에 설단(設壇)하여 비()를 세우고 혼령(魂靈)을 안치(安置)하였다. 제전(祭田)과 의례기물(儀禮器物)을 갖추어 제향(祭享)을 올림이 해를 거듭하여 인결(禋潔)하나 틈이 없어 재실(齋室)을 짓지 못하였더니 이제 모든 종친들이 성심(誠心)을 모아 올해(1967·丁未) 8월에 신단(神壇) 밑에 날아가듯 단장하여 법도(法度)에 따른 절차까지 마쳤으니, 장하다 아니할 수 없다. 새가 날 듯한 수십 칸이 엄연하게 일신(一新)하였으니 가히 기관(奇觀)이 나타났고 편액(篇額)의 재호(齋號)를 온수재(溫水齋)라 하였다.

()35세 후손인 한은(漢隱) 규환(奎煥)씨는 오래 전부터 외우(畏友)이다. 앞서 공의 신도비(神道碑)에 글을 내가 엮은 바 있으며 이번에도 사양치 못하고 이 재기(齋記)를 지으니 참으로 감회가 무량하다. 이 재실(齋室)에서 화수(花樹)의 정의(情誼)를 모으고 후세(後世)의 자손들이 선대(先代)의 조상들의 유업(遺業)과 유훈(遺訓)을 이어받아 향화(香火)를 성심껏 올리며 돈목(敦睦)을 꾀하여 자손(子孫)된 도리(道理)를 다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용화산(龍禾山)은 좋은 경개(景槪)라 산하(山河)와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이 재실을 보존할 것이니 이 어찌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같은 뜻에서 짤막하나마 이제 명구(銘句)를 엮으니 설아산(雪蛾山)은 천고(千古)에 우뚝 서서 마주 바라보고 온천물은 한없이 솟아나니 천만년이 가도록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죽계(竹溪) 안인식(安寅植) 삼가 발문(跋文)을 짓다





* 중시조(中始祖)에서 13() 파조(派祖)까지의 역정(歷程)

 

우리 방씨 문중의 족보에 중시조이신 운(:溫水君)공께서 918(戊寅)에 태어나셨다. 때는 신라 54대왕인 경명왕 2년이고,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27년째 되던 해이며, 궁예가 태봉을 세운 지 18, 발해가 애왕 18, 왕건이 나라 이름을 고려라 정하고 송악(개성)에서 건국하였던 해로서 단기로는 3251년이었다.

92711월에 견훤(甄萱)이 경주에 침입하여 살륙을 할 때 방씨(方氏)도 멸문(滅門)의 화()를 입었다. 그때 공께서는 10세의 어린 아이로 간신히 홀로 살아남아 유랑생활을 하는 기구한 운명을 보냈다.

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新羅 景哀王 丁亥完山賊甄萱入寇하여 縱徒大掠方氏니라. 萱有舊怨으로 及萱叛先害方氏 하니 方氏無孑有暴亡하고, 得免이나 時年14세에 形貌奇異하고 資質絶倫하니 不忍害之. 公走匿山中賊之山下하니 忽然雲霧四塞하고 雷雨大作하야 賊退去니라. 隱居 高麗하시다.” 이 글을 풀어 다듬으면 다음과 같다.

신라 경애왕 정해년 때 완산에서 일어난 견훤이 쳐들어와 방씨를 대량 학살하였다. 견훤이 옛 원한을 품고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방씨를 먼저 해치니, 남아있는 사람이 없을 만큼 죽임을 당하였는데 공만이 화를 면하였고 그때 나이가 14세였다. 공의 모습은 형체가 기이하고 자질이 매우 뛰어나니 적이 해치지 않고는 참지 못하였다. 공이 달아나 산속에 숨어 있어 적들이 산 아래로 다가올 때 홀연히 안개와 구름이 자욱하고 천둥을 치며 큰 비가 내리니 적들이 물러갔다. 그래서 공은 숨어 지내다 고려 건국에 참여하였다.” 참으로 공께서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살아남은 사연을 알 수가 있다.

이후, 타고난 천재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공께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재덕(才德)을 꾸준히 쌓으셨다. 이러할 때 고려 왕건의 심복 장수인 유금필(庾黔弼)에 의해 수려한 풍모와 탁월한 문장 그리고 뛰어난 무예 실력이 인정되어 약관 17세에 왕건 휘하의 친위대에 선발되었다. 933(고려태조13) 5월에 후백제 견훤 군대가 의부성을 침입했을 때 공께서는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을 기회라 생각하시고 용약매진하여 큰 공을 세웠다. 9349월에는 태조 왕건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후백제 견훤군을 운주(運州:홍성)에서 대파하여 웅진(熊津:公州) 이북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공께서 발군의 용맹을 떨쳐 왕건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으니 그때가 18세였다. 935년 공께서 19세가 되던 해에 견훤에 의해 왕이 되었던 경순왕이 투항해 왔고 아들 신검과의 싸움에서 쫓기던 견훤마저 항복하였다. 이때 철천지원수인 견훤을 눈앞에 두고도 죽일 수 없으니 공께서는 아마도 인간사(人間事)의 무상(無常)함을 크게 깨달으셨을 것이다.

936년에 선산(善山)에서 신검(神劍)의 후백제 군대를 대파하여 항복을 받아 드디어 고려가 후삼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공께서는 그때 세운 혁혁한 무훈(武勳)으로 태조 왕건의 총애를 받았으며, 새 나라의 조정에 출사(出仕)하여 국가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태조 왕건을 섬기며 11, 혜종에게 2, 정종에게 4, 광종에게 26년 그리고 경종에게 6년과 성종에게 16, 여섯 임금을 60여년 모시는 동안, 문무를 겸전한 공이시라 무관직인 중무장군(中武將軍:4)과 대장군(3)을 거쳐 문관으로 천거되어 좌승지(3)를 시작으로 상서도성의 지성사(知省事:2)를 역임하시고 정승 자리인 좌복야(左僕射:2)에 오르셨다. 그때가 936(광종14)으로 공의 나이 46세였다. 2년 후, 왕의 특사로 송()나라에 갔는데, 송 태종이문무겸전하여 출장입상(出將入相)하는 공의 인품을 가상히 여겨 대우가 달랐으며, 더욱이 선조가 당나라에서 건너간 한림학사 월봉선생이라 하여 특별히 중국의 한림학사 반열에 제수하는 영예를 받았다.

또한, 공은 993(성종12) 2월에 거란군이 침입하여 파죽지세로 개경으로 몰려올 기세를 보이자 조정의 일부 신하들이 화평을 위해 평안도 지방을 할양하려 할 때, 의연히 반대하며 당시 중랑장이었던 서희(徐熙)장군과 함께 거란 장수 소손녕을 만나 담판을 하여 자진퇴각토록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듬해에는 여진족의 침입을 깨끗이 물리치고 압록강 이남의 평안도 땅을 완전히 장악했다. 77세의 노장(老將)으로서 큰 공훈을 세우니 성종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정1품인 온수군(溫水君)의 봉호를 내리시고, 충청도 온양군 동쪽 과안산(過雁山) 아래 살게 하였으며 그 산 이름으로 방씨를 우러러 모신다는 뜻으로 배방산(拜方山)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온양 일대의 세 읍(三邑:온양·신창·아산)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였고, 그때부터 온양에 자손이 세거(世居)하므로써 온양(溫陽)이 방성(方姓)의 성관적(姓貫的) 종읍(宗邑)이 되었으며, 온수군의 후손은 고려시대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 대를 이어 살아왔다.

온양방씨명현록을 보면 온수군의 배위는 밀양박씨(密陽朴氏)918(태조1)에 태어나시었으며 유택(幽宅)은 배방산 안에 있다고 전해졌다. 이후, 공으로부터 7세손 되는 재()까지 6대가 독자(獨子)로 계대(系代)를 이루며 내려왔다.

 

온수군의 아들인 2세 중탁(仲鐸)께서는 고려 7대 왕 목종(998~1009) 때에 도첨의 정승(1)을 지냈으며 영국(寧國)이란 시호를 추증 받았으며 묘소는 부친과 같이 배방산에 모셨다. 손자인 3세 휴()께서는 8대 왕 현종(1008~1031) 때 무관인 중랑장(4)으로 10182월에 10만의 거란군이 다시 침입하자 강감찬 장군과 같이 출전하여 흥화진에서 적군을 대파하여 격퇴시켰다. 그 무공으로 정2품인 온양군(溫陽君)의 봉작을 받았다. 증손(曾孫)4세 도안(道安)께서는 관직이 급사(給事)로 기록되어 있고, 고손(高孫)5세 태열(兌說)께서는 호장(戶長)을 지내셨다 하며, 곤손(昆孫)6세 유()께서는 15대 왕 숙종(1095~1105)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추밀원 직학사를 거쳐 문하성 평장사와 문하시랑까지 오르신 유명한 재상이시다.

잉손(仍孫)7세 재()께서는 17대 왕 인종(1123~1146) 때 영남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내셨다. 1134년에 왕이 묘청(妙淸)의 꼬임에 빠져 서경(西京:평양)의 대화궁으로 옮겨가고 이듬해 묘청이 임금을 연금하면서 국호를 천개(天開)로 고치며 정사를 전횡하자 김부식과 함께 평양으로 쳐들어가 묘청을 토벌하고 국왕을 구했다. 그 공으로 임금께서 온양군의 봉작을 내리고, 돌아가신 후에는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공의 매부가 영일정씨(迎日鄭氏) 시조인 정습명(鄭襲明)인데, 고려 말 충신인 포은 정몽주의 8대조가 된다.

운손(雲孫)8세 일()께서는 의종(1147~1170) 때 온양성주(溫陽城主)를 지낸 후 평생을 처사(處士)로 마치셨다.

9세손인 희진(曦進)께서는 1175(명종5) 10월에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해 대과인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대제학과 양광도관찰사를 역임하셨으며, 특히 문장이 뛰어나 그 명성이 드높았다. 아호는 박재(博齋)이고, 아들()과 손자(萬年)와 함께 양주(楊州:동두천 지향리)에 모셨다.

10세손 걸()께서는 족보에 호장으로 적혀 있으나 만송당 문의공(文毅公:15)의 비석에는 광록대부로 정승을 지내셨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공의 배위가 안동권씨로 장인이 상서좌복야를 지낸 점과 부친이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보아 호장은 잘못된 기재로 판단하여 광록대부로 고친다. 11세손 만년(萬年)께서는 1209(희종6)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을 거쳐 상서령(尙書令)과 첨의시랑찬성사를 역임하셨다. 희진··만년 세 분의 묘소가 양주 지향리에 함께 모셔져 있어 매년 1010일 시제(時祭)를 지내고 있다.

12세손 우선(于宣)께서는 1250년에 태어나시어 1269(원종10)에 약관 19세 때 문과 감시(監試)에 도장원(都壯元)으로 급제하시어 충렬왕 때 평양부윤과 안정도 존무사를 역임하시고 정당문학에 이어 64세인 1314(충숙왕)에 상서령에 오르셨다. ()나라 인종황제가 공께서 70세일 때, 선조이신 중국 하남에 살던 당나라 한림학사 월봉선생의 후예라 하여 하남후(河南候)의 봉호가 특별히 제수되었으며, 첨의중찬으로 계시다가 돌아가시자 문정(文定)이란 시호를 추증하였다. 묘소는 의정부 또는 누원(樓院)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7세조 충숙공 재()께서는 두 분의 아들을 두셨는데, 큰아들이 일()이시고 작은 아들이 보()라고 계보도(系譜圖)에 기록되어 있으나, 차계(次系)8에서 12득세까지 이어진 계대(系代)에 착오가 있음이 발견되었다.

사료(史料)를 고증하여 보면, 8께서는 1125년 경 출생하여 1270(원종11)에 배중손 등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몽고에 저항하여 싸우려고 진도로 들어갈 때의 기록(高麗史世家원종133월조)에 의하면 <밀성군(密城郡:밀양)에서 방보(方甫) · 계년(桂年) · 박평(朴平) · 박공(朴公) · 박경둔(朴慶鈍) · 경기(慶棋) 등이 군 안의 사람들을 모아 장차 삼별초에 응하려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보()께서는 분명히 11세 만년(萬年)과 같은 항렬인 량()의 항렬로 내려와 이어져야 하고, 10세로 된 우현(佑賢)9세 희진(曦進)과 같은 항렬이며 바로 이 분이 상주방씨(尙州方氏)의 중시조가 되어 있음으로 9세로 올라감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니 현재 상계(上系)의 계보도에 () () 우현(佑賢) ()으로 되어 있는 순서를 우현 득세(得世)의 차례로 고쳐야 한다고 본다.

또한 13세 항렬에 신우(臣佑) 상락부원군과 신제(臣悌) 금자광록대부의 서차(序次)가 바뀌어 있다. ‘신제1214(갑술)에 태어나 1297년에 86세로 돌아가셨으며, ‘신우1277(병자)에 태어나 1350년에 75세로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제의 생년(生年) 차이가 60년 이상 벌어져 매우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나, 어쨌든 기록을 근거로 한다면 신제가 형이 되어야 하고 신우가 아우가 되어야 함으로 이번에 고쳐 놓는다.

12세에 내려와 장손(長孫)인 문정공 우선(于宣)과 차손(次孫)인 참판공 우번(于蕃) 그리고 계손(季孫)인 의국공 득세(得世), 삼형제에 와서 비로소 자손이 번성하여 7개 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그 7형제가 고려와 조선의 두 왕조에서 현달하였으므로 각 파의 후손들이 이 분들을 중조(中祖)로 모시게 되었다.




 

문정공(文定公) () 우선(宇宣) 행장기(行狀記)

 

방우선(方宇宣)은 상서령(尙書令)을 지내신 만년(萬年)의 맏아들로서 1253(고려·고종40:계축)에 태어나셨다. 1269(원종10)에 약관 17세에 생진감시(生進監試)에 급제하고, 1302(충렬왕28) 6월에 김원상(金元祥)이 국가고시를 볼 때 6(六經)에 통달한 사람을 국학박사로 선발하되 그 합격자는 계급을 높여 승진토록 하자는 건의를 하였다. 이 시기가 공께서 49세 되었을 때로 국학박사가 되어 위계가 높이 승진되었다. 1311(충선왕3) 58세에 평양부윤(平壤府尹)과 안정도(安定道) 존무사(存撫使)를 겸임했으며 1313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1314(충숙왕1)에 상서령에 배수된 뒤 이어서 추밀원사(樞密院事)를 역임하셨다. 1321(충숙왕8)에 첨의중찬(僉議中贊)의 중책을 맡으시다 향년 68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니 나라에서는 문정(文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의 묘소는 양주군 다락재(누원현 쌍문동 일대)라고도 하고, 의정부 산등성이에 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가 않다. 배위(配位)는 안동김씨(安東金氏) 또는 평양조씨(平壤趙氏)라고도 하나 밝혀진 바가 없다.

 

공께서 17세 되던 해에 감시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했을 때 시험관이 문순공(文純公) 원부(元傅)였으므로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어느 날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묻기를 내가 외람되이 정사(政事)에 참여하고 있는데 나에 대한 여론이 어떠한가?’ 하였다. 이에 공께서 선생님께서 정사를 돌봄이 마치 선생님의 성()과 같이 원···(···)의 원리대로 하십니다.’ 라고 대답하니, 스승께서 웃으시며 내가 내 성을 본 따 원리(原理)로서 오늘에 이르렀다면, 만약, 그대가 그대의 성을 본 따서 정치를 한다면 어떻게 하려는가?’ 하며 물으니, 공께서 말씀드리기를 정의롭고 정당하며 방정(方正)하고 방직(方直)하게 한다면 아니 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1308년에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무종황제를 배알하는 자리에서 황제께서 공이 당()나라의 월봉선생(月峯先生) 후예임을 알고 특별히 하남후(河南候)로 봉작하였다. 충선왕 때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로부터 하남후라는 훈호를 받으면서 방씨(方氏)는 본래 중국 하남성 사람이니 그대에게 이 작위를 내리는 바는 그 근본(根本)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공께서는 문학(文學)과 덕망(德望)이 당세의 으뜸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명문가의 기주(紀註)와 명문(銘文)을 많이 저술하였다. 저명한 시구(詩句)들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으며, 많은 기사문(記事文)櫟翁稗說)에 담겨져 있다.

동문선 154쪽에 공께서 운()을 띄워 홍약(洪瀹)이 연경(燕京:북경)에 갔을 때 읊은 시()가 있다.

백년사는 인생 얼마나 되는고, 허송세월 부모에게 효도 못했네.

구경(九經)으로 업()을 잇고, 삼사(三史)까지 겸하여 다섯 아들의 가지를 이어 열손(十孫)을 두어 다복(多福)하구나.

글과 검으로도 평생에 뜻을 펴지 못했거니 성은(聖恩)에 보답코자 하해(河海)같은 마음 한때인들 잊었으리오.

하늘가 먼 곳에 노니는 아들의 생각 그지없으리. 이따금 고향산천(故鄕山川)을 향해 술 한 잔을 붓노라.”

, 동문선 20권에 최성지(崔誠之)가 방학사우선(方學士宇宣)께서 댁()을 그냥 보고 지나간 데 대한 사과의 글을 옮긴다.

문지기 사환 아이가 미련하기 목석(木石)같아, 그릇 명공(明公)으로 하여금 흥()이 다해 돌아가게 하였네. 돌아가는 행장(行裝)을 끌어잡지 못하여 이제오서 가슴을 헤쳐 풀기 어려워라.”





판서공(判書公) () () 행장(行狀)

 

방서(方曙)는 하남후(河南候)에 봉작된 문정공(文定公) 우선(于宣)의 아들로 국진(國珍)이라고도 한다. 1275(충렬왕1:을해)에 태어나시고 시호는 장헌(莊獻)이다. 1294(충렬왕20)에 제술업(製述業)인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중국 황민(황민)의 자손이라 하여 빈공과(賓貢科)에 발탁되었다. 아버지 우선(于宣)께서 1302(충렬왕28) 6월에 국시(國試)인 통경과(通經科)에 합격하시어 직급이 올랐을 때, 공의 관직은 기거사인(起居舍人·5)으로부터 중서사인(中書舍人·3)에 승진했다가 1309년에 밀직원 대언(密直院代言·3)이 된 다음 1307(충렬왕33)에 판도사(版圖司)의 판도판서(版圖判書·3)에 올랐다. 두 번의 사만(仕滿:복무연한)을 마치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서 충숙왕 때 대제학(大提學·2)이 되어 문형(文衡)을 담당하셨으며 1332년에 5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첫 부인(初配)은 순천김씨(順天金氏)로 전교시(典校寺) 판사(判事)를 지낸 김천호(金天皓)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再配)은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아버지이신 성재공(誠齋公) 우선(于宣)께서 1314(충숙왕1)에 상서령(尙書令·1)에 배수(拜受)되어 행직(行職)인 추밀원사(樞密院事)로 계실 때 공께서는 판도판서를 지내어 부자(父子)가 함께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됨으로써 당시에 그 명성(名聲)이 세상에 크게 떨치었다.

공께서는 당대(當代)의 크나큰 석학(碩學)으로서 지은 시()동문선(東文選)에 많이 실려 있으며 청구풍아(靑邱風雅)역옹패설(櫟翁稗說)그리고 보감(寶鑑) 등에도 널리 수록되어 있다.

동문선 154쪽에 실린 글을 살피건대, 침봉현(沉鳳縣)으로 가게 되는 조충 원수(趙冲元帥)가 방서(方曙)에게 보낸 시구(詩句)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높고 높은 잔도를 말고삐 늦추고 가노라니

시내와 봉우리 다한 곳에 성()터만 남아 있네.

숲 사이 자욱한 안개 속에 달팽이 같은 오두막 집을

나무 끝 나직한 하늘 아래 샛길이 빗겼구나.

골짜기에 가득찬 연기는 그림 폭을 대하는 듯

내 며칠 동안 외로운 관()에 묵노라니

()빛과 물빛이 꿈에 들어 산뜻하네.“

, 청구풍아 4권에 실린 계림군공(鷄林郡公)인 정승 왕후(王煦)에게 보내는 만사(輓詞)를 옮긴다.

조정(朝廷) 벼슬길에 꼿꼿하게 섰으나 그 어찌 그 공()이 헛되게 되는고

응당히 고관(高官)으로 드날려야 됨을 재앙으로 갚게 되니 그 어인 일인고

풀 캐어 관()을 덮으니 보이나니 저 멀리 들판 뿐인데

이 나라 기둥이 쓰러지니 태산이 무너짐만 같구나

주자(朱子)의 도학(道學)은 날로 얕어지고 온 세상 슬프기만 하네.

님의 덕()을 되돌아보며 산()길을 내려오니 푸른 구름 가을 빛은

높은 매봉우리에 걸쳤구나.”





간의공(諫議大夫) () () 세덕비(世德碑)

 

이요 관작은 간의대부 이시며 간의공파 파조님 이시다

근원조 아득한 옛날 고대 중국 BC 27974806년 전 三皇 중 한분이신 炎帝神農氏 성은 씨이며 제위 10대기간 440년 역사를 이어 오시던 중 근원조의 10楡罔황제의 장자 諱 雷公께서 하남성 方山 땅을 봉작 받으시고 BC 2357년 지금부터 4366년 전 方氏로 사성을 받으셨다 창시조 133세인 군강의 장자이신 諱 讚公의 후손은 중국에서 세거 번영하시고 차자이신 諱 智公은 당고종 총장왕 2년 황명을 받으시고 신라 문무왕 9년 서기 669년에 한림학사로 초빙을 받아 문화사절로 한반도에 내조 하시어 온양방씨 시조가 되시었다

諱 智公千慶이요 月峯 또는 花川 이시며 중국의 유교서적인 6(관례, 혼례, 상례, 향음, 酒禮, 상견례) 9(주역, 시경, 서경, 예기, 춘추, 논어, 맹자, 효경, 周禮)등을 가지고 오셔서 해석 편역 하셨으며 설총 강수 등 많은 후학을 가르치시고 신라조정 승문원 태학사로 제도의 개혁과 외교를 맡아 설총과 더불어 국정을 도우셨다 재차 양국 국정에 따라 귀화 하시어 장씨 규수와 결혼하시고 상주 땅을 사패지로 받아 세거 하시니 후손들이 상주를 구 관향으로 삼으셨다 자 헌주공은 상주현주 자부는 孫 諱 길정공은 전경부경 누세 손 동양공은 예부대광 광개공은 시위부대장군 보혁공은 평안군 공요공은 화령군 이시며 고대중국의 황족 후예로서 신라에서도 대대로 명재상 가문으로 이어 오셨습니다 시조님으로 부터 위 역대 유택은 울산 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산 70번지에 모셔 있으며 제실은 봉계리에 있습니다

중시조 諱 雲公 께서는 신라 경애왕 3년 서기 926년 후백제 견훤의 난으로 방씨 가문이 멸문에 화를 당할 때 10여세 단신 소년 홀로 천신의 은혜로 피신하여 만고역경의 꿈을 성장 고려왕건 개국 시 선봉장으로 대활약 하셔서 개국공신이 되시므로 3대 임금을 섬기시며 좌복야 특별관작인 溫水君 麗宋 한림학사를 봉작 받으시고 온양 아산 신창 3읍을 사패지로 녹봉 받으셨으며 북방거란 여진 침입시 도원사로서 완전 진압한 공훈으로 고려 6대성종 13년 서기 992년 과안산을 배방산으로 고쳐 명명 하사 받으셨습니다 누대로 7군 온수군 온창군 온양군 온천부원군 온성군 군의군 상락부원군 세록지신 명재상가문 으로 부인 밀양박씨 규수와 결혼하시어 온양을 세거지로 관향을 삼고 다시 중시조를 1세로 하여 유택을 배방산에 모시고 자자손손 종문 역사를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간의공의 파조 諱 玄公의 부친은 諱 于宣公 이시다 중시조 12諱 于宣公 께서는 고려 명재상 대학자로 외교에 능통하시어 명나라 사신으로 세차례나 다녀오셨으며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시니 . . . . (玄 曙 暄 迪)이 시다 諱 玄公 파조님은 장자 명분의 음사를 받으시고 고려대과인 明鏡科 종직으로 간의대부를 세수 받으셨으며 학문이 출중하시어 동문선습에 등재하는 등 시서에 능통한 학자셨다 배위 현풍곽씨 규수와 결혼하시어 평택을 세거지로 삼아 명재상 가문 후예로서 세상에 덕행과 자손 번창을 이루시며 대대로 살아 오셨습니다 자 諱 枝柱公 판도판서 손 諱 錡公 함경감사 증손 諱 千桂公 군기사등을 두셨으나 유택은 모두 실전 되었으며 17諱 致延公 이하 후손들의 유택은 전국 각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시대변화에 따라 이씨조선 개국 시 고려 명재상 가문인 우리 방씨 후손들에게 신세력에 협력하기를 강요하였으나 불복지신 이라 하여 끝내 동참하지 않으므로 중시조 이하 선영의 유택을 파혜치고 관직박탈은 물론 갖은 피해와 죽음을 당하여 후손들의 생존을 위해 은신처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풍화역사 긴긴 세월 명맥을 이어온 후예들 어찌 하오리까 모든 것을 잠재하고 이제라도 찾아 回顧 하며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으나 후손들의 뜻을 모아 파조님의 근원지 옛 고향 평택에 20세 이상 선조님들 세덕비를 세워 누누세세 정성껏 숭배하고 후손들의 단합과 가문의 역사가 중흥 되기를 기원합니다

문중역사에 중요한 사명을 담당한 37세손 간의공파 영식회장의 유구한 가문의 자료를 받고 탐구 한 바 과연 뿌리가 깊고 훌륭한 조상님을 모신 가문임을 진심으로 찬사를 드리며 오고 가는 역사에 길이 빛나는 가문이 되시길 근찬 합니다

 

200911월 일

 

史學博士 松亭 姜 熙 秀 謹撰

溫陽方氏 諫議公派 大宗會 謹建





태상경(太常卿) 군위군(軍威君) 제단비문(祭壇碑文)

 

경상남도 합천 북쪽 우곡리 우산(愚山)에 군위방씨(軍威方氏)의 제단이 있으니, 관조(貫祖)이신 군위군(軍威君)을 모시는 제단이다. 관조의 휘(:죽은 사람의 이름)는 적()이시고, 시조(始祖)의 휘는 지()이시며 아호는 월봉(月峯)이시다. 시조께서는 당()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계시다가 신라(新羅)의 초빙으로 문학(文學)을 선교(宣敎)하러 오시니 동쪽 나라에서 방씨(方氏)의 시조가 되시었다. 이로부터 18()에 이르러 첨의중찬(僉議中贊) 벼슬을 지내신 선조(先祖)인 우선(于宣)께서 곧 군위군(軍威君)의 아버지가 되시며 아호는 성재(誠齋)이며 시호는 문정공(文定公)이시다. 군위군께서는 고려 충렬왕 때에 태상경(太常卿)이란 높은 관직에 오르시고 왜구를 토벌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군호(君號)를 받으셨다. 이러한 연유에 따라서 자손들은 원래의 본관인 온양(溫陽)에서 군위(軍威)로 분관(分貫)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후손들은 합천(陜川)에 세거(世居)하였으며, 6세손 중지(仲止)는 사맹(司猛)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7세손 유령(有寧)은 감사(監司)를 지낸 후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우곡의 산은 본래 두 분의 묘역이다. 군위군의 묘소는 경북 군위군 남면 적산(赤山)의 자좌(子坐)에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키지 못하여 실전(失傳)하였으므로 제례를 못 지내 자손들의 유한(遺恨)이 이어 내려왔다. 그래서 일가제족(一家諸族)들이 상의한 결과, 이미 군위군 적산의 유택(幽宅)은 징험(徵驗)을 얻지 못하였으니 그럴 바에야 합천 우곡의 영역(瑩域)에 제단을 모시고 향사(享祀)함이 낫다고 거의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우산묘원(愚山墓園)의 정상 오른편에 설단(設壇)을 하고 1년에 한 번씩 제향을 올리기로 하였으며, 비문을 짓고 돌에 새겨 비석을 세워 군위군의 업적을 후손 만대에 이르게 하여 기념하고자 선조에 대한 경존(敬尊)의 모습을 드러낼 비문을 나에게 짓도록 위촉하였다. 그러나 이번 제단을 옮겨 모시는 일에 대하여 일부 족인(族人)들이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바, 군위의 적산(赤山) 쪽에서는 원래의 묘소가 있던 곳을 떠나 먼 합천으로 옮기는 일이 부당함을 주장하는 반면, 합천의 우산(愚山) 쪽은 이미 여러 대의 선영이 있으며 자손들이 가까이 모여 사는 곳에서 묘역의 수호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 혼령은 신묘하고 신통하여 무소부재(無所不在)로 왕래하니 구애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입장이다. 다만 옛 선현들의 말씀에 이르기를, 신도(神道)란 지하수(地下水)가 땅속에 널리 퍼져 흐르는 것과 같아 지하의 물을 찾는 일은 정성에 달려 있을 뿐이니, 조상(祖上)의 얼은 조상과 자손 사이에 흐르는 혈류(血流)와 같아 일맥상통하는 것이므로 잃은 조상의 묘소를 찾으려는 혈통적 성심(誠心)은 조상의 얼과 합치되고 통감(通感)되는 이치이니 만큼 우산 쪽의 주장이 도의에 크게 어긋나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미 군위군 선조의 묘소가 실전된 지 오래 되었음에도 자손들이 심혈(心血)을 기울여 한결같이 성심(誠心)으로 추원추모(追遠追慕)하니 지성(至誠)의 도리는 아득하고 멀어졌어도 통()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그 어찌 적산과 우산의 양쪽에 간격이 있겠는가! 나는 제족들의 지극하고 존귀한 성심에 감격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비로소 붓을 잡아 글을 엮으며 또 줄을 이어 말씀드리나니, 나뭇가지가 많다 해도 그 뿌리는 하나로서 한 뿌리가 통해서 두 가지가 없도다. 뿌리가 없었던들 줄기와 가지가 있을소냐, 뿌리 없는 나무가 땅속에는 뻗었겠는가! 땅이란 체백(體魄)이며 혼()이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도다. 자손은 그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후손들이 충효의 추모가 어찌 끊어질 것인가! 적산에 모신 군위군 선조를 오래고 멀다 하지마라! 넓고 넓은 큰 바다도 한 방울의 물과 한 몸이니 가신 할아버지의 삶을 이어 누린 자손들이 천추만세(千秋萬歲)에 제사를 그치지 말지어다!

971(辛亥)에 권용현 지음





광록대부(光祿大夫) 평장정사(平章政事)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방공신우(方公臣佑) 사당비명(祠堂碑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익재난고(益齋亂藁)6에서 발췌


1345(충목왕1) 5월에 중정대부 좌부대언 인복(仁復)은 왕명(王命)을 예문춘추관에 전갈하는데, 작고한 평장정사 상락부원군 신우(臣佑)는 상국(上國: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매우 총임(寵任)을 받고 우리 고려조정에서도 충성을 다하였으니, 비록 지금은 세상을 떠났으나 내 오직 잊지 않고 마음에 품어 영관사(領館事) () 아무개로 하여금 그 행실을 비문(碑文)에 기록하라고 권해온 이가 있어, 신이 삼가 알아보니 방씨(方氏)는 대대로 경상도 오성현의 사족(士族)으로서 그 증조부인 우현(佑賢)은 하남후(河南候)로 증직되고 할아버지 량()은 하남군공(河南郡公)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득세(得世)는 영록대부(榮祿大夫) 주국(柱國)에 임명되어 의국공(義國公)에 봉해졌다. 어머니 김씨(金氏)는 의국대부인(義國大夫人)으로, 부인 이씨(李氏)는 밀직사사(密直司事)인 이선시(李先時)의 따님으로 의국부인(義國夫人)에 봉해진 것은 모두 평장사의 연고로써 은전(恩典)이 주어진 것이다. 평장사의 어릴 때 이름은 소공(小公)인데 충렬왕 때 궁중급사(宮中給事)로 있으면서 이름을 신우(臣佑)로 바꾼 것이다.

제국대장공주의 성품은 엄숙하고 밝아서 좌우의 시신(侍臣)이 허물이 있으면 털끝만치도 용서치 않았으며 홀로 근신(勤愼)함으로써 눈에 띄게 신임(信任)이 두터웠다. 공민왕 15년에 공주를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동궁(東宮)의 유성황후(裕聖皇后)를 배알하였는데 한 번 보더니 머물러 있게 하고 망고태(忙古台)라는 이름을 내렸다. 성종(成宗)이 유성(裕聖)을 존중하여 황태후라 하였으며, 특히 망고태에게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장알승(掌謁承)을 제수하고 조금 지나 통봉대부(通奉大夫)에 천부대경(泉府大卿)을 가직(加職)하였다. 무종조(武宗朝)에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를 흥성궁에서 섬길 때, 장작원사(將作院事)로 고치고 한 계급을 올려 정봉대부(正奉大夫)에 장알경을 겸하게 하였다. 황제가 말씀하시기를 망고태는 궁성(宮省)에서 힘을 베푸느라고 여러 해를 수고한지라 내가 그 공()을 아름답게 여기노라하니, 황태후가 망고태는 먼저 태후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그의 부지런한 것을 보았으되 아직도 게으른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였다. 이에 계급을 올려 영록대부 평장정사에 나아가게 하고 먼저의 장작원사와 장알경을 그대로 있게 하였다. 또 말씀하되, ‘고려 사람은 해자(楷字) 글씨를 잘 쓴다 하니 그 누가 잘 쓰는가? 김서장교(金書藏敎) 이래로 망고태가 아니면 경영을 이룰 수가 없다.’ 수레(어차:御車)가 경사(京師:서울)에 이르면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망고태가 민첩하며 능히 공경함을 알겠으니 큰일을 맡기겠노라하였다. 태정황후(泰定皇后)의 대우가 더욱 두터우니 진저노(晉邸老)당들이 혹간 허물하여 말을 하며는, 황후가 말씀하시기를 유성황태후 때부터 그 아래에서 법도(法度)를 익혔으니 너의 무리들은 미칠 바가 아니다.’ 하고,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제수하며 휘정원사(徽正院使)로 바꾸었다. 문종2(고려충숙왕15)에 광록대부(光祿大夫) 저경사사(儲慶司使)를 더하였다. 일곱 조정(朝廷)에 두 태후(太后)를 섬기는 중에 기밀에 참여하여 모사(謀事)를 맡았고 좋은 모책(謀策)을 바쳐 그 취지를 일컫지 않음이 없었으며, 여러 번 모피 갓옷과 구슬 옷 그리고 모자며 금옥칠보요대(金玉漆寶腰帶) 등과 강남에 기름진 밭 4천무()와 황금보초(黃金보초) 따위를 부지기수로 받았으니 계산할 수도 없다.





온양방씨(溫陽方氏) 장파(長派) 종보(宗譜)

   (일부 발췌)

 

13세 서()

()는 원명(源明) 또는 국진(國珍)이며 시호는 장헌(莊獻)이다. 충렬왕 때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대언 · 판도판서 · 대제학을 지내시어 봉익대부에 오르고, <소한당집:所閑堂集>에는 전리판서와 춘추관사를 지내셨다고 한다.

첫 배위(初配)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아버지는 삼일포 매향비를 세운 판전교시사와 강릉도 존무사를 지낸 천호(天晧)이다.

둘째 배위(再配)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14세 언휘(彦暉)

()는 원가(遠可)이며 호는 독락정(獨樂亭)이고 시호는 경숙(敬肅)이다. 충혜왕 때 향공진사(鄕貢進士)를 하고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을 거쳐 밀직원(密直院) 직학사(直學士)를 지냈으며 온천부원군(溫泉府院君)에 봉해졌다.

배위는 서산정씨(瑞山鄭氏)로 아버지는 상서(尙書)를 지낸 유()이고 할아버지는 원외랑(員外郞)을 지낸 인()이며 증조는 원외랑을 지낸 수거(秀琚)이다.

묘소는 두 분 모두 위와 같다.

 

15세 순()

처음 이름(初諱)은 득주(得珠)인데 비석에 순()으로 새겨져 있어 고쳐서 기록한다. 호는 만송당(晩松堂)이며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언(代言사인(舍人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를 지냈으나, 조선 왕조에 들어서는 둔촌(遁村) 이집(李集) 등과 경기도 광주에 은둔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예조참의에 특별히 제수되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양무리 경좌(庚坐)에 있다.

첫 배위(初配)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호이고 할아버지는 해이며 증조는 소윤을 지낸 정이다. 외조는 지선주사를 지낸 강양이씨 원후이다.

둘째 배위(再配)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아버지는 삼중대광 월성군 천이며 호는 국당(菊堂)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증조는 호가 송헌(松軒)으로 세기(世基)이다. 외조는 횡성조씨(橫城趙氏)로 문근(文瑾)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탄동 해좌(亥坐)에 있으며 비석이 있는데 이씨와 윤씨가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고 하나, 이씨의 표석이 없으므로 확실하지가 않다.

 

* 족보 원문과 대조해 보면 틀린 부분이 산재해 있어 논의를 거쳐 내용을 정리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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