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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3-05 17:31 조회1,0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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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양방씨 시조

 

 

 한림학사 월봉선생 (始祖 翰林學士 月峯先生)

시조의 이름은 지()이고 자는 천경(千慶)이며 호는 월봉(月峯)이시다. 서기 650년경(:고종2)에 한림학사로 계시다가 황제의 명령을 받고 동방의 신라에 오셨다. 당시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던 때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친당(親唐)정책을 택하였던 시절이었다. 선진국인 당나라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의 힘을 기르고자 노력하던 신라는 당나라의 학자를 초빙하였는데, 서기 669(문무왕9)에 바다를 건너오신 분이 월봉 시조님이시다. 마침 고구려와의 전쟁이 심하여 일시적으로 상주(尙州)에 머물러 계시다가 신라 조정에서는 이듬해 상대등 부한(夫邯)의 건의로 상원정사에 빈객부를 설치하여 선생을 맞이해서 국시문정(國是文正)이라는 강의를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라에 중국문장(中國文章)에 대해 밝게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서, 오직 설총(薛聰)만이 약통(略通)하므로 그를 헌병구임(헌병구임)두고 가르침을 베풀었다. 문법(文法) · 문예(文藝) · 문정(文正) · 예속(禮俗) 등의 의역(意譯)과 선전(宣傳)의 행사를 자세히 하여육례회통(六禮會通)과 구경대지(九經大旨)를 밝혀서 유학(儒學)과 예교(禮敎)를 진흥시키고민속의 융화(순화?)를 위해 지방을 순회하시었다.

처음에 동쪽으로 오실 때에는 신라에서 문화전달의 임무를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가 그 성과를 황제에게 보고하고 고향인 하남(河南) 땅에서 조용히 지내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관계가 점점 험악해져 전쟁이 계속되므로 문화사업 또한 지지부진하였을 뿐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본국인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 정벌에 내응하기 위해 신라에 여러 해를 계속 머물다가, 신라사람의 권유로 부인을 맞이하니 그 배위(配位)가 장씨(張氏)이다. 서기 676(문무왕16)에 선생의 아드님이신 헌주(軒柱)가 가유현 현주(縣主)에 임명되고 후손이 이어지면서 답달비군(荅達匕郡), 곧 상주(尙州)에서 대()를 이어 살게 되었다.

 

 

 

 

 

                      ◆ 온양방씨 중시조

 

 

고려 상서 좌복야 온수군 운 (高麗 尙書 左僕射 溫水君 諱 雲)

서기 889(신라 진성왕3)에 멸망한 옛 백제의 유민(遺民)인 견훤(甄萱)이 스스로 후백제를 세우고, 926(경애왕3)에 신라를 습격하여 서라벌을 함락하면서 왕과 귀족들을 살해하였다. 이때 방씨 문중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임을 당했는데 하늘이 굽어 살피셨는지 오직 온수군 운()만이 목숨을 건져 겨우 10세의 나이에 다행히 탈출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유랑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공께서는 천재를 발휘하여 재덕(才德)을 갖춘 문무쌍전(文武雙全)의 대장부로 성장하였으며 왕건의 후백제 정벌에 참여해서 크게 전공(戰功)을 올렸다. 또한 고려 초기에 요()나라가 침공했을 때 결정적인 군공(軍功)을 세워 963(광종14)에 상서 좌복야의 고위관직에 올랐고, 994(성종13)에 온수군(溫水君)의 봉작을 받았으며 온양군 동쪽 8리 쯤에 위치한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과안산 아래에 자리 잡고 그 산을 배방산(拜方山)이라 이름하였다. 방씨(方氏)에게 절하는 산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 자손이 온양(溫陽)에 세세손손 오래 살았으므로 온양은 방씨의 관향(貫鄕)을 상징하는 종읍(宗邑)이 되었다. 이와 같이 온수군 이래 방씨는 고려의 세록지신(世祿之臣)이 되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다가 온수군의 14세손인 온천부원군(溫泉府院君) 언휘(彦暉)가 충목왕의 국구(國舅:왕의 장인)가 되었다. 이에공민왕 때에 선대 왕의 증영미수(曾榮未遂)를 계승하고자배방산의 제택(第宅)을 보호하기 위해 성첩(城堞)을 쌓고 그 안에 온수군의 묘원(墓園)을 옮겼던 소중한 터였다. 그러나 고려 말엽에 이르러 온수군의 16세손인 태부경(太府卿) 유정(有程)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름에 당당히 불응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자 모든 관직을 강등시키고 사패지를 몰수하였다. ! 온수군 이하 모든 유택(幽宅)은 파괴되고 묘비를 비롯한 많은 석물들이 철폐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배방산(拜方山)은 고려 왕조가 방씨의 고유한 특권을 인정하여 방씨에게 절하는 산이라는 뜻으로 이름하였는데, ()를 배()자로 바꿔 배방산(排方山)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훗날 1714(숙종40)에 온수군의 26세손 참의공 최일(最一)소계거정(訴啓擧旌)하였으나 비답(批答:임금의 답변)선대 왕이 정한 사유를 뒤집을 수 없다며 다만 ()을 방()자로 고치라하여 그때부터 배방산(排芳山)이라고 불러 면()의 명칭도 따라서 배방면(排芳面)이 되고 말았다.

오호라!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고(桑田碧海) 해와 달도 뜨고 지는데(日月盈昃)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와 같이 억울한 경우를 당하고 기나긴 세월이 지났건만 우리 후손들은 통한(痛恨)을 씻어내지 못한 채 기형적(畸形的) 상태를 보면서 수백 년을 보내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 씨족이 분발하여 서로 호응하고 의견을 모아 배방산 옛터에 단()을 쌓고 묘()를 옮기는 정민지역(貞珉之役)하고자 분주하니 우리 방씨 문중에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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